매우 똑똑한 정치인들이 왜 바보처럼 보이는걸까.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거짓말을 해야 하나. 그들에게는 진실보다 그들의 이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조잡한 변명들은 진실을 이길수가 없으니 눈만 껌뻑껌뻑하며 바보같은 말들만 늘어놓을 수 밖에.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동정심이 사라진, 인간성이 거세된 인간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외로워 하는 동안에, 인간보다 더 인간적으로 공감해주며,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생긴 AI를 장착한 로봇이 상용화 될 날이 머지 않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 것은 사람이라는 그 자체가 아니라 얼마나 사람답게 타인을 대하느냐에 달린 것이라는걸.

사진을 찍고 들어온 당일은 누가 봐도 임팩트 있는 사진들을 편집하고 웹에 올리게 된다. 그런데 다음날, 또는 몇주후 찍은 사진들을 보다 보면, B급이라 생각했던 사진들에서 어떤 느낌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마치 밥을 지은 뒤 뜸을 들이는 것처럼 사진도 뜸을 들이다 보면 완성되는 것들이 있다.

기분이 아주 째지는구만. 아주 Jazzy해.

철학자는 개소리를 매우 길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코스코에 갔을 때 받은 느낌은, 아니 느낌이라기 보다는 내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단어는 '자본주의'였다. 풍부한 자본과 인간의 욕망이 잘 버무려져 보이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 근처에 이마트 트레이더스에 종종 가게 된다. 푸드코트에서 파는 조각 피자는 대략 3500원 정도이다. 가격대를 보고 두 개는 먹어야 배가 부를 것이라 생각한 나를 비웃듯 트레이더스의 조각 피자는 장엄하기까지 하다. 이 가격으로 나를 배불릴 수 있으니 자본주의의 맛을 계획주의 경제가 당해낼 수가 있나.

이천 롯데 아울렛에 갔다. 여느 때처럼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앳되어 보이는 여자 사람이 다가오더니, 사진을 찍으시는거냐 물었다. 나는 여기는 사진을 찍으면 안되는 장소인지 되물었다. 그랬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면서 하늘을 찍은거냐고 물었다. 나는 하늘을 찍은게 아닌데, 이 장소는 사진 찍는게 안되는 곳이냐 다시 물었다. 안전요원은 그게 아니고 다른 의도를 가지고 촬영을 하실 수도 있어서... 하였다. 내가 다시 어떤 다른 의도를 말하는건지 물었다. 안전요원은 몸둘 바를 모른채 당황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렇게 당황할꺼면 애초에 왜 말을 건 것일까. 이 사건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특성상 카메라의 시야에 노출되는 것을 비정상적으로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건 2000년대 초 SLR 클럽을 비롯한 여러 사진 애호가들이 커다랗고 시커먼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뭐라도 되는양 행세하며 눈살 찌푸리는 행동을 많이 했기 때문일 수 있다. 성추행 등의 불미스러운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사진을 찍을 권리가 박해 받아서는 안된다. 공공장소에서 특정 인물을 특정하지 않으면 나는 그 장면을 찍을 권리가 있다. 그건 내 눈으로 장면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안전요원으로서 뭔가 임무를 수행하고 싶었던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 안전요원의 행동은 여러가지 면에서 실수다. 내가 범법행위를 저지른다고 생각했다면,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서 나를 경찰에 신고했어야 했고, 그런 결정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면 쇼핑 중인 고객을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으로 의심했으면 안된다. 아니, 의심해도 되지만 나에게 그 생각을 들켜서는 안된다.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프레임은 중요하다. "뭘 찍으시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내가 뭘 찍는다고 답할 의무는 없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는 사진 찍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곳인가요?"라는 말로 되받아친 것이다.

인간 종족의 가장 큰 문제는 관심이 없던 것에 대해서 다른 인간이 관심을 보이면 경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는 사후에 필름 뭉치가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사울 레이터 역시 당대에는 유명해지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사후에 내가 찍어놓은 수천장의 사진이 유명해 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라고 봐야지.

산책을 하다 보면 커다란 거미줄이 꽤 자주 보인다. 촘촘히 짜여진 거미줄의 가운데는 노란배에 검은색 가로줄이 있는 거미가 앉아 있다. 커다란 거미줄을 보면서 저것을 만드는데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람에 찢어질 수도 있고, 비가 내리면 다 망가질 수도 있을텐데, 그 때마다 거미는 힘든 보수 공사를 해야 할 것이다. 이 넓은 공원에서 거미줄에 벌레가 걸릴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까? 그 때까지 거미는 굶주린 채로 인내해야 하겠지.
거미를 보다가 갑자기 동네옷가게가 떠올랐다. 전통시장의 골목에 허름한 가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옷가게가 있다. 무척이나 화려하지만 유행이 지나버린 것 같은 다양한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있다. 알록달록한 무늬를 보면 거미줄 가운데 있는 거미가 떠오른다. 과연 이 허름한 옷가게에는 옷을 사는 사람들이 오기는 올까. 옷을 몇 개 팔면 먹고 살 정도로 벌 수 있을까. 그 자리에 앉아서 손님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옷가게 주인의 운명은 거미줄 가운데 있는 거미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이다.
이런저런 주제 넘은 걱정을 하다가 현실을 떠올려 보았다. 거미가 죽지 않고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은 가끔씩 덫에 걸려드는 벌레가 있다는 것일테고, 옷가게 주인이 임대료를 지불하고 옷을 전시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먹고 살만큼 옷을 사주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임대료를 낼 필요가 없는 건물주이든가.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걷다가 불현듯 배가 고파져 주위를 둘러보고 가장 가깝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빵집으로 들어간다. 주위에는 많은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바쁜듯이 그 앞을 지나다닌다. 이곳은 버스터미널 같은 느낌이 든다. 멈춰있는 사람보다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다. 밀어야 할지 당겨야 할지 모르는 쇠문을 밀고 빵집 안으로 들어간다. 빵을 팔고 있지만 손님이 올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빵집 주인이 슬쩍 쳐다보고는 이내 하던 일을 계속한다. 가게 안을 한 번 스윽 둘러본다. 구석자리에는 중년 여성 둘이 언제 시켰는지 모를 커피를 사이에 두고 수다에 열중하고 있다. 밀폐된 공간에 혼자만 서있는 주목받는 느낌을 오래 견딜 수가 없어 진열대 위의 빵을 하나 집어든다. 빵은 갈색인지 검은색인지 모를 색에 스펀지 같은 구멍이 있다. 빵을 하나 들고서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다. 쓴맛 밖에 느낄 수 없는 몹쓸 아메리카노가 나오기 전이다.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테이블에 빵을 두고 오래 앉기는 힘든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기다린다. 배가 고파 빵을 먹고 싶지만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린다. 커피와 함께 먹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빵집 주인은 테이블로 커피를 가져다 준다. 커피에는 크림과 설탕이 적절히 섞여 부드러운 실크같은 색이다. 이제야 빵을 한 입 베어문다. 빵의 살결에 이가 파고들어가는 시간을 최대한 끌어본다. 폭신한 식감이 다가오며 단맛이 느껴진다. 단맛 뒤에 쌉쌀한 시나몬의 맛이 따라온다. 내가 무심결에 집어든 벽돌 같은 빵은 시나몬 카스테라 조각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폭신한 빵의 조직 사이사이로 커피가 스며들며 빵을 스르르 녹인다. 카스테라와 따뜻한 커피의 조합을 발견하고 신은 스스로에게 얼마나 만족했을까. 빵집에는 별다른 볼일이 없었으므로 카스테라와 커피를 다 먹자마자 문을 열고 나온다. 나는 다시 분주한 거리의 일원이 되어 다리를 바쁘게 움직인다.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

이런 속담이 있는 자체가 사람들은 책을 표지로 판단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품을 판매할 때 제품의 품질이 최상인 것보다, 적절한 품질을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1. 소비자의 눈에 띄게 할 수 있는 브랜딩과 마케팅
2. 눈에 띄었을 때 고급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는 디자인
이 두 가지가 핵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비즈니스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뛰어난 마케터와 디자이너가 필요하다는 얘기.

산책을 하다가 곤충의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다. 곤충이 사람에게 다가오는 상황을 사람에게 대입하면 어떤 느낌일까. 높은 고층 건물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나보다 몸이 수천 수만배가 큰 생물들이 내 주위를 걸어다닌다. 난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주위를 기어 다니거나 날아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 그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심기가 불편해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이 휘두른 손에 맞아 난 죽는다는 느낌을 느낄 새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웬만한 공포 영화의 디스토피아적인 설정을 가져와도 이보다 더 공포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 인간은 생물종 내에서 크기가 중간 정도는 된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나마 인간보다 덩치가 큰 동물들은 우리의 생활권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거나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있다. 곤충에 감정이입을 해서 생각해 보니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불안한 세상인지, 곤충에게는 내가 이입할만한 감정이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곤충이 고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일까? 아니면 곤충도 그 정도의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걸까.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수명이 며칠 정도로 짧은걸까. 내가 인간으로 걸어다닐 수 있음이, 내 주위에 나를 위협할 만한 거대한 생물체가 어슬렁거리지 않음에 감사하게 되는 산책길이었다.

출근길에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서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집에서 공원쪽 샛길을 통해서 나오면 버스가 다니는 길이 있고 차가 그다지 빠르게 달리지 않는 왕복 2차선 도로를 건너면 바로 버스 정류장이 있다. 집에서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을 보고 나가지만 때로는 버스가 예상보다 빨리 도착할 때가 있다. 이런 이유로 횡단보도를 좀 급하게 건너는 편이다. 물론 사람이 건너려는 기색이 보이면 차는 당연히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미국에서는 횡단보도 저멀리서 사람이 걸어오면 차가 미리 정지해 있어서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더니 버스 도착까지는 아직 4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내가 건너온 횡단보도에는 중학생처럼 보이는 학생 한 명이 서있었다. 차들은 간간히 지나다녔지만 길을 못건널 정도로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학생이 건널 의도가 있는지 없는지 점차 궁금해졌다. 차들이 간헐적으로 지나갔고, 난 계속 횡단보도를 지켜보고 있었다. 양방향 모두 차가 완전히 오지 않는 시점이 되자 학생은 건널목을 건넜고,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좀 뜻밖이었다. 내가 움찔거리면서 횡단보도로 진입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운전자들을 멈추게 만드는 액션이겠지만, 횡단보도 앞에서 정승처럼 서있는 액션 역시도 운전자들을 멈추게 하는 액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미국처럼 횡단보도 앞에서 차량이 멈추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더 적합한 액션은 점잖은 기다림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횡단보도에서 덤덤하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모습을 보고 정지해 주는 차량들이 많아지고 그렇게 차량이 보행자를 보호하는 문화가 점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 학생 세대가 볼 때는 횡단보도로 움찔거리며 전진하는 내가, 보행자를 보고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치는 운전자와 동일한 미개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세대에서 당연한 것들이 요즘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차 안에 재떨이가 달려있었던 '빨리빨리' 대변되던 8~90년대를 지나,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선진국이 될 수 있는 시점에서 어린 친구들에게 나의 행동이 어떻게 비춰질까 고민하게 되는 출근길이었다.

누군가의 낙원은 누군가의 지옥 위에 세워졌음을. 행복을 기대하며 시작한 장소는 불행한 기억을 가진 장소로. 새로운 행복을 찾아 떠난 곳은 새로운 불행이 시작되는 곳으로. 더 불행해지게 더 불행해지게.

53평의 번듯한 집과 번쩍이는 플래그십 세단과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과 최고급 카메라와 렌즈들. 예전이라면 엄두도 못냈을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예전보다 점점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꽁냥거리며 15평의 오피스텔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신혼부부의 설렘이 좋다. 지나가는 외제차를 보며 언젠가는 나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사진을 찍으러 걸어다니던 그 때가 좋았다. 더 가질수록 행복하지 않지만, 이제 와서 덜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아닐테니까.

인간의 오랜 본성인 내로남불은 옛속담에서도 볼 수 있다. 완전하게 동일한 뜻은 아니겠지만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속담을 보면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빽빽하게 무덤들이 줄지어 있는 공동묘지가 떠오른다. 그 많은 무덤 중에서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한 이상한 일들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나의 가장 치명적인 실패조차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남의 행동에 대해서는 서릿장 같은 잣대를 적용한다. 원칙적으로 잘못된 일이고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어줍짢은 사과는 사과문의 형식에 맞지 않는 변명일 뿐이다. 사과를 하려면 사과만 해야지 이유를 늘어놓는 것은 사과문을 가장한 변명문이라고 생각하며, 대중들은 '순수한' 사과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각각의 무덤에도 핑계가 있다. 핑계는 곧 서사다. 결과로 봤을 때는 하찮기만 한 죽음, 심지어 악인의 죽음에조차 서사가 있다. 인간은 애초에 내로남불 하게 이기적으로 생겨먹었지만 서사를 통해서 공감하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내로남불은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감이고,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게 되고 심지어 악인의 행적에도 불쌍하게 여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범죄자에게 서사를 입히지 말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범죄자에게는 공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내로남불의 태도로 그들을 단죄하면 되는 것이다. 결국 내로남불과 공감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부모에서 나온 쌍둥이 같은 것이다. 그들의 사정을 모를 때 나는 나의 잣대로 나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 감정이입이 되고 같은 편이라는 느낌이 든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같이 고생하고 회식을 하며 흘러왔던 서사는 그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어 준다. '이웃의 신발을 신고 한참을 걸어보기 전에는 그들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인디언 속담이 있다고 한다. 결국 인간이란 태어날 때부터 우리편 상대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많이 공유한 사람이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다.

인터넷 연결이 없는 상태에서 OTP는 특정 숫자를 생성해내고, 그것을 인증 목적으로 사용하는 원리가 너무 궁금했었다. ChatGPT가 다 설명해 주었다.

https://chat.openai.com/share/d9d017cb-f8bb-4175-bfe8-1cb1b302e339

패션과 유행은 더 낫고 못함이 아닌 그저 지난 세대와 다름의 표현이다

후회, 회한, 그리움, 자책 등은 모두 과거를 향해 있는 감정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퉁쳐서 매몰 비용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살아가는데 매몰 비용을 무시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처사이지만, 이것이 사람다운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