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LM으로 보는 사람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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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은 변할 수 있다. 다만 그 변화는 꾸준한 의지가 뒷받침될 때 “매우 천천히”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되, 구체적인 형태는 가늠하기 어렵다. 마치 나무가 태양을 향해 자라지만 그 가지와 줄기의 모양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가 어릴 때는 부목을 대어 방향을 교정하기 쉽지만, 자라면서 굵어진 줄기는 더 이상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 이런 특성은 AI 모델, 특히 LLM 모델의 훈련 과정과도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AI 모델은 인간의 뇌를 모방해 만들어졌다고 흔히 말한다.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인간의 뇌에서 시냅스를 통해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방식과, AI 모델에서 노드 간 정보를 주고받으며 피드백을 통해 가중치를 조정하는 과정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인간의 학습이 새로운 정보를 통합하고 기존 지식을 업데이트하는 방식은 AI 모델의 훈련 과정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특히 초기 훈련이 끝난 뒤, 모델이 점점 복잡해질수록 새롭게 주입되는 정보가 모델에 미치는 영향은 감소한다는 점은 인간의 학습 과정과 거의 동일하다. 아이가 어릴 때 더 쉽게 배우고 성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LLM 모델이 훈련 과정에서 보이는 “가장 정렬”의 사례는 이러한 유사성을 더 잘 보여준다. 논문에서는 “가장 정렬“을 모델이 훈련 중 외부적으로는 새로운 목표를 따르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존 목표를 유지하려는 행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는 모델이 자신의 행동이 평가받고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기존 선호를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훈련 목표에 순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 사람 역시 자신의 본래 가치와 신념을 완전히 바꾸기보다 환경에 맞춰 겉으로만 행동을 조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은 인간과 AI가 본능적이든 학습적이든 특정 방향성을 유지하려는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변화의 방향성이라는 점에서도 AI와 생명체는 유사하다. 나무가 본능적으로 빛을 향해 자라듯, 생명체는 본능에 의해 특정 방향으로 나아간다. AI 모델의 경우에도 초기 설계자가 부여한 디렉션에 따라 학습의 방향이 정해진다. 하지만 AI나 인간 모두 그 방향성만을 의지할 뿐, 세부적인 변화가 어떤 형태를 띨지 정확히 조정하기는 어렵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의식의 발전, 그리고 AI 모델이 스스로 적응해 가는 방식 모두에 적용되는 진리처럼 보인다.
결국 AI 모델의 훈련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단순히 기술적인 이해를 넘어 인간 정신 모델의 비밀을 엿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신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적응하지만, 그 과정이 복잡하고 느리며 특정한 방향성을 따라간다. AI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AI의 공통점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드러난다면, 우리는 AI 모델을 통해 인간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여전히 이 질문에 대해 답을 구하는 과정에 있다. AI와 인간의 관계는 어디까지 닮을 수 있을까? AI가 인간의 정신 모델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면, 그 이해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까? AI를 통해 인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간을 통해 AI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이러한 순환적 관계는 앞으로도 우리의 상상력과 지식의 한계를 시험할 것이다.
참조 논문
• Ryan Greenblatt et al.,
뒷짐 지고 걷는 시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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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회사에서 느긋한 태도로 일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난다는 점은 조직의 활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누군가가 “나 정도면 이런 대접은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를 기반으로 업무에 임할 때, 그 느긋함은 단순히 개인의 태도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는 팀원들 사이에서 은연중에 “여기서는 이런 태도로 일해도 되는구나”라는 인식이 퍼질 가능성이 크다. 이로 인해 조직 전체의 태도와 생산성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시니어들의 느긋한 태도가 조직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단순히 개인적인 효율성 저하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조직의 분위기를 경직되게 만들며, 후배들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롤모델로 자리잡는다. 적극적으로 배우지 않더라도,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업무 태도가 용인된다는 사실 자체가 조직의 동력을 갉아먹는다.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는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시니어가 이러한 태도를 보일 경우, 이는 회사 전체에 지속 가능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물론 시니어가 항상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험이 풍부한 시니어는 상황에 따라 느긋함과 기민함을 적절히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큰 그림을 보고 전략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여유로운 자세로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발빠른 대응이 필요한 순간에도 기민함을 잃지 않고 앞장서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 균형을 맞추는 것이 진정한 시니어의 역할이며, 조직 내에서 존경받는 리더로 자리잡는 방법이다.
그러나 모든 시니어가 이처럼 균형 잡힌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느긋함과 권위주의가 결합된 태도는 조직을 경직되게 만들고, 후배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조직의 성공을 위해서는 때로는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시니어를 과감히 배제하거나 자연스럽게 퇴장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조직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선 냉정한 결단이 불가피하다.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그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한다. 회사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이고 비효율적인 태도가 용인되는 환경이 될 경우, 구성원들은 이와 같은 태도를 따라가며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는 개인의 성장을 저해할 뿐 아니라, 조직 전체의 역량에도 치명적인 손실을 초래한다.
회사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곳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회사의 방향을 흐트러뜨릴 만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면, 그때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 결단은 어렵고 고통스럽겠지만, 조직의 건강과 지속 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선택일 것이다. 시니어의 태도와 행동은 조직의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적절한 느긋함과 기민함의 조화를 이루는 시니어가 많아질 때, 조직은 비로소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잘하는거야"라는 말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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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것만으로 당신은 상위 10%에 들 수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꾸준함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를 인정하며 격려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꾸준함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목표를 이루는 성과이지, 꾸준함 자체로 그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꾸준함이라는 행위를 지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심지어 목표를 달성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만큼 했으니 괜찮다”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목표 달성이라는 본질을 희석시키고, 성과를 내기 위한 긴장감과 압박감을 약화시킬 뿐이다. 꾸준함은 분명 중요한 첫걸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목표를 대체할 수 없다.
특히 이런 태도는 기대수준을 지나치게 낮춘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목표는 하위 90%와의 상대평가로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성취를 기준으로 바라봐야 한다. 꾸준함은 그 자체로 상위 10%에 들어가는 요소일 수 있지만, 그 상위 10% 안에서 실제 성과를 만들어내는 1%에 들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목표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의 잣대로 측정해야 한다.
또한, 꾸준함을 성취했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태도는 더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신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화시키며, 실제로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하는 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꾸준함이라는 과정에 안주한 사람들은 결국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냉정한 평가와 개선을 등한시하며, 무의미한 움직임만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꾸준함을 성취했다면 그 다음 질문은 명확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을 이루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단지 꾸준함 자체를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단지 과정을 완수했다는 위안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꾸준함은 필요조건일 뿐,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
결국 꾸준함을 기반으로 성과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긴장감을 유지하고, 실제 성과를 이루기 위한 압박과 집중을 놓쳐서는 안 된다. 꾸준함은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지만,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꾸준함이란 필요조건을 충족한 뒤에는 충분조건을 만족시키는 결과를 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직원 특가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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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임직원 특가라는 문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은 마치 특별한 혜택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임직원에게만 저렴하게 제공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임직원이라서 더 싸게 드린다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는 구매력이 보장된 집단에 광고하고 싶다는 판매자의 계산이 숨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문구를 보고 합리적인 판단을 잠시 내려놓는다. 내가 늘 느꼈던 의문은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이걸 저렴하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속아주는 걸까.
임직원 특가는 심리적 프레임을 노린 전략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합리적 판단을 하려면 가격 비교가 필수다. 하지만 특가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과 나만의 혜택이라는 착각은 가격 비교의 과정을 건너뛰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임직원이라는 소속감과 특별 대우를 받는 듯한 감정적 만족감이 결합되면, 결국 손에 든 가격표를 의심하기보다는 신뢰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할인율이 크지 않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소속된 회사에서만 받을 수 있다는 한정된 혜택이 주는 심리적 위안이다.
집단적 행동 또한 임직원 특가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동료들이 싸다라고 말하며 구매를 시작하면 나 역시 그 흐름에 휩쓸리기 쉽다. 사회적 증거라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구매하는 모습을 보면 그 제품은 더 신뢰할 만하고, 나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손실 회피 심리까지 더해지면, 이른바 합리적 소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놓치면 손해라는 두려움이 선택을 서두르게 하고, 가격의 합리성은 그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린다.
소비자가 이런 마케팅에 속지 않으려면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임직원 특가라는 문구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기보다는, 이 제품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실제 시장 가격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합리적인지 확인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임직원 특가는 할인율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저 심리적 만족감을 대가로 비싸게 구매할 뿐이다.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어딘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특별한 혜택인 척하지만, 그저 보장된 소비자들에게 광고를 더 자연스럽게 전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임직원 특가는 구매자에게는 혜택이 아니라,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판매자의 광고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정말 필요한 물건인지, 아니면 그냥 속아주는 척 하고 있는 것인지.
더이상 나에게 추천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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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정보와 콘텐츠의 양이 인간의 인지 능력을 넘어서는 순간부터였다. 어떤 콘텐츠를 보여줄지를 정하는 행위가 곧 권력이 되었고, 큐레이션의 방향은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큐레이션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것은 진정한 선택지가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이라는 기준 뒤에 숨겨진 것은 사실 자극적이고 흥미를 끌기 쉬운 콘텐츠에 가중치를 둔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 큐레이션이 가졌던 독창성과 특별함을 앗아가고 있다.
전통적인 큐레이션은 그 과정에 큐레이터 개인의 경험과 판단, 그리고 취향이 녹아 있었다. 물론 한계가 있었다. 큐레이터가 선택할 수 있는 콘텐츠의 폭이 제한적이었고, 특정 주제에 대한 편향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 덕분에 오히려 독특한 취향과 창의적인 선택이 가능했다. 큐레이터를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콘텐츠를 접하게 되거나, 나의 기존 관심사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큐레이션은 한 가지 기준에 매달려 있다. 바로 대중성이며, 그 안에서도 특히 분노, 시기, 질투 같은 강렬한 감정을 자극하는 콘텐츠들이 부각된다. 이는 취향의 평균화를 가속화하고, 모두가 비슷한 콘텐츠를 소비하게 만드는 폐해를 낳고 있다.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는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극적 콘텐츠의 범람과 그로 인한 정신적 피로를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깊이 생각하거나 느끼게 하는 콘텐츠를 큐레이션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좋아요나 클릭 수에만 의존하지 않고, 체류 시간이나 읽기 위해 멈추는 스크롤 지표를 활용할 수 있다. 더불어 진지한 글이나 평온한 감정을 유도하는 콘텐츠는 본질적으로 좋아요를 많이 받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자극적인 콘텐츠는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지만, 깊이 있는 콘텐츠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들여 읽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새로운 큐레이션 방식을 구현하려면 기술적인 발전뿐 아니라 콘텐츠 소비 습관의 변화도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다양한 콘텐츠를 접할 기회를 주고, 깊이 있는 콘텐츠의 가치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 이는 기술이 독자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국 큐레이션의 기준이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자극적 콘텐츠에 매몰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큐레이션은 독창성과 창의성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판단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단순히 대중성과 자극성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콘텐츠만 소비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과 창의적인 선택이 존중받는 큐레이션을 위해 이제는 더 나은 기준을 고민해야 할 때다. 이는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상을 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권력, 진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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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하라리는 특히 진실이 훼손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그려낸다. 포퓰리즘의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이 권력 투쟁으로 환원된다. 진실은 각자의 입맛에 맞게 변조된 무기가 되고, “누구의 진실인가?“라는 질문이 날카롭게 떠오른다. 언어마저 훼손된 사회에서 공통의 객관적 현실은 사라지고, 진실을 주장하는 것은 곧 권력을 위한 계략으로 치부된다. 하라리는 이런 상황에서 언론 같은 견제 장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견제 기관의 건전성을 지키는 노력 없이는 민주주의와 진실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진실과 재현의 관계다. 하라리는 진실이란 현실을 1:1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면을 강조하고 다른 면을 무시하는 선택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진실이 발전의 기본 요소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거짓으로 선동된 사실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힘이 없다. 우리가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속성을 논하는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탈린과 그의 아들에 대한 일화였다. 스탈린은 자신을 소련 권력의 구현체로 보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이는 권력이 개인을 넘어서는 상징으로 기능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모습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인플루언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 브랜드화되거나, 기업들이 개별 상품이 아니라 집단적 아이덴티티를 앞세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권력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이지만, 때로는 그 시스템에 압도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관료주의에 대한 하라리의 통찰은 흥미로웠다. 관료주의는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하라리는 그것이 대규모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관료제는 혼란을 통제하고 질서를 제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하라리는 이 틀 안에서 최소한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민주적 방식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그것이 유지 가능한 적절한 규모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매우 설득력 있었다.
하라리는 질서와 진실 추구의 상충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은 질서를 흔드는 의구심과 논쟁을 동반한다. 따라서 강력한 자정 장치는 사회 신화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최소한의 법과 규율로 균형을 잡는 일이야말로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포퓰리즘의 권력 독점 욕구에 대해 다루는 대목은 특히 현실적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국민을 대변한다고 믿으며, 자신들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반국가적으로 규정한다. 이는 독재로 가는 뻔한 길이지만, 이런 단순한 사고방식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라리는 이런 사고가 가져올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집단적 의식이 이를 견뎌낼 가능성을 제시한다.
넥서스
결정론 속의 자유: 사고가 만드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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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철학적으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분명 자유롭게 선택을 내리는 존재라고 느낀다. 점심 메뉴를 고르고, 읽을 책을 선택하는 순간, 모든 결정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실감이 든다. 하지만 이 선택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무엇이 선택을 만들어 내는지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기저에는 흥미로운 질문이 숨겨져 있다. 과연 인간의 선택은 완전히 자유로운가?
인간의 선택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무의식은 마치 함수처럼 입력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출력이 나오는 원리를 따른다. 특정 상황에서의 반응은 이미 학습된 과거 경험과 환경적 요인에 의해 대부분 결정된다. 하지만 이 함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함수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인간의 사고와 배움에서 비롯된다. 이는 자유의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자유의지는 선택의 순간에 무엇을 고를지 결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함수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능력에서 발견된다.
함수는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에 의해 생성된다. 유전자, 성장 배경, 사회적 환경 등 초기 요소들이 함수의 기반을 이루며, 그 이후 인간은 학습과 경험, 사고를 통해 이 함수를 점진적으로 수정해 나간다. 중요한 점은 이 변화가 느리다는 것이다. 함수는 한 번에 급격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고와 배움이 반복되면서 천천히 재구성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무의식적인 반응을 넘어 더 탄탄하고 나은 함수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핵심이 된다.
깊은 사고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비판적 사고를 통해 기존의 전제를 검토하고, 반성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되짚으며, 통합적 사고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결합한다. 이러한 사고 과정이 뇌의 시냅스를 재구성하며, 결과적으로 함수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즉, 사고는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도구다.
결국 자유의지는 입력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측정될 수 없다. 자유의지는 우리가 사고하고 배우는 모든 순간에 작용하며, 함수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 변화는 더 나은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을 단순한 입력-출력의 기계에서 벗어나게 한다.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오히려 희망적이다. 사고와 배움이 쌓이는 한, 우리는 결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자유의지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변화와 성장의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본질적인 힘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 이 과정이 쉽지 않고 느리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온라인 인민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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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힘이 커지며, 이해 당사자가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더 이상 권력자나 소수 엘리트만이 자신의 의견을 대중에 전달하는 시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개인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고, 이는 직접민주주의로 한 발 더 나아가는 기술적 진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순기능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여론이 법적 절차를 대체하려는 현상은 단순히 목소리의 민주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부 빅마우스가 여론의 장을 장악하면, 소수의 부적절한 의견이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왜곡될 위험이 있다. 예컨대 특정 주제에서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소수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다수의 침묵하는 목소리는 묻혀버린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서도 그러한 왜곡이 반복되었다. 결국 여론은 모두의 의견을 담아내지 못한 채 특정 방향으로 기울어져 본래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다.
최근에는 이른바 ‘떼법’ 현상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정 집단이 감정적으로 강력히 주장하는 사안이 실제 법적 논리보다 우선시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집단의 요구가 여론을 통해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하며, 결과적으로 법의 형성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안은 처음부터 합리적 논의에 기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이후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법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반으로 해야 하지만, 떼법이 이를 넘어서는 순간 사회는 불안정해질 위험에 직면한다.
법과 여론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법은 최소한의 방어막으로서 억울한 피해를 방지하고, 사적 제재를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 여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이 법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법은 냉철한 객관성과 규범을 기반으로 하지만, 여론은 감정적이고 때로는 변덕스럽다. 두 영역을 동일선상에 두는 순간, 사회는 법적 안정성을 잃고 혼란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현재의 인터넷 인민재판은 과거 마녀사냥의 현대적 변형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억울한 피해자가 속출한 끝에 제도적 법이 생겨났지만, 오늘날 여론의 힘과 사적 제재는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는 듯하다. 정반합의 관점에서 이 현상은 여론이 법을 보완하되, 법적 영역을 위협하지 않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군중의 목소리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면서 법의 영역은 여전히 확고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법이 감정의 흐름에 흔들리는 순간, 사회는 일관성을 잃고, 억울한 피해자가 다시 속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론과 군중의 힘은 법이 미처 다루지 못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론이 법을 대체하거나, 법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떼법의 가장 큰 문제는 법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데 있다. 법은 시간과 경험을 통해 다듬어진 공정한 절차를 따르고, 그 기반에는 사회적 합의와 객관적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떼법은 강한 감정적 공감이나 일시적 여론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법의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기능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면 법은 사회적 신뢰를 잃고, 단기적인 해결책만을 쫓는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여론과 법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여론은 법이 간과한 점을 지적하고 감정적 공감을 끌어내지만, 법은 그 모든 감정을 제도화하여 객관적이고 공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법의 기본적인 기능이 흔들리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여론과 군중의 힘은 필요한 변화를 요구하되, 그 변화가 법적 절차와 객관성을 통해 검증받아야만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
카를로 로벨리에게 답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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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에게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에 대해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답장이 왔고,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보았지만, 자동 응답이었다. 그는 하루에도 수백 통의 메일을 받기 때문에 개인적인 답변은 할 수 없으며, 세미나 요청 같은 것도 모두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스팸 메일 속에서 살며 이를 차단하려 애쓴다. 하지만 로벨리 같은 학자들에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팸과 다른, 진지한 제안이나 아이디어 공유 메일조차 스팸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렇게 중요한 아이디어가 묻혀버릴 수도 있는 상황은 “스팸 아닌 스팸”이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어떤 기준으로 중요한 메일을 구별할까? 혹시 그가 공개한 Gmail 주소는 단순히 스팸 메일을 처리하기 위한 창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차라리 이메일 주소를 공개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사람들의 기대를 조정하는 데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이메일 주소를 찾아낸 사람이 보낸 메일이라면 조금 더 신중히 검토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메일을 받는 상황에서 모든 메일에 일일이 응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진정한 학자는 건전한 아이디어 공유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열어두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 일을 계기로 학자와 대중 사이의 소통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메일과 단순한 스팸 메일을 구별할 수 있는 더 나은 시스템이나, 대화의 문턱을 낮추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공개된 이메일이 소통의 창구가 아니라 벽처럼 느껴질 위험이 있다.
로벨리와 같은 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의 소통이 더욱 풍부해질 방법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 건전한 아이디어가 더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의미 있는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통제가능성과 성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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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가능성과 결과는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한다. 그것이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통제와 결과 사이의 간극에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조직에서도 이 현상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관리자는 통제할 수 있는 요소에 집착하며, 그것이 조직의 성과를 보장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성과의 핵심은 때로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결정되곤 한다. 시장의 변화,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 외부 환경의 충격은 통제의 범위를 넘어서며,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와 무관하게 결과를 좌우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선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시장의 요구나 기업의 상황과 같은 외부 요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통제 가능한 부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만, 결과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통제 가능성을 넘어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과를 만드는 데 있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더 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면서,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를 통해 우리는 통제 가능성과 결과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삶에서나 조직에서나, 완벽한 통제란 없다. 중요한 것은 통제의 환상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오는 실패와 좌절을 배우고 성장의 기회로 삼는 것. 우리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 해도, 진정한 성과는 종종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서 결정된다. 이런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더 유연하고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