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직원 특가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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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임직원 특가라는 문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은 마치 특별한 혜택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임직원에게만 저렴하게 제공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임직원이라서 더 싸게 드린다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는 구매력이 보장된 집단에 광고하고 싶다는 판매자의 계산이 숨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문구를 보고 합리적인 판단을 잠시 내려놓는다. 내가 늘 느꼈던 의문은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이걸 저렴하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속아주는 걸까.

임직원 특가는 심리적 프레임을 노린 전략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합리적 판단을 하려면 가격 비교가 필수다. 하지만 특가라는 단어가 주는 선입견과 나만의 혜택이라는 착각은 가격 비교의 과정을 건너뛰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임직원이라는 소속감과 특별 대우를 받는 듯한 감정적 만족감이 결합되면, 결국 손에 든 가격표를 의심하기보다는 신뢰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할인율이 크지 않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소속된 회사에서만 받을 수 있다는 한정된 혜택이 주는 심리적 위안이다.

집단적 행동 또한 임직원 특가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동료들이 싸다라고 말하며 구매를 시작하면 나 역시 그 흐름에 휩쓸리기 쉽다. 사회적 증거라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구매하는 모습을 보면 그 제품은 더 신뢰할 만하고, 나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손실 회피 심리까지 더해지면, 이른바 합리적 소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놓치면 손해라는 두려움이 선택을 서두르게 하고, 가격의 합리성은 그저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버린다.

소비자가 이런 마케팅에 속지 않으려면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임직원 특가라는 문구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기보다는, 이 제품이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실제 시장 가격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합리적인지 확인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임직원 특가는 할인율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저 심리적 만족감을 대가로 비싸게 구매할 뿐이다.

나는 이 문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어딘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특별한 혜택인 척하지만, 그저 보장된 소비자들에게 광고를 더 자연스럽게 전달하려는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임직원 특가는 구매자에게는 혜택이 아니라,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판매자의 광고비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정말 필요한 물건인지, 아니면 그냥 속아주는 척 하고 있는 것인지.


더이상 나에게 추천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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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정보와 콘텐츠의 양이 인간의 인지 능력을 넘어서는 순간부터였다. 어떤 콘텐츠를 보여줄지를 정하는 행위가 곧 권력이 되었고, 큐레이션의 방향은 우리의 관심과 시간을 지배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큐레이션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것은 진정한 선택지가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이라는 기준 뒤에 숨겨진 것은 사실 자극적이고 흥미를 끌기 쉬운 콘텐츠에 가중치를 둔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방식은 전통적 큐레이션이 가졌던 독창성과 특별함을 앗아가고 있다.

전통적인 큐레이션은 그 과정에 큐레이터 개인의 경험과 판단, 그리고 취향이 녹아 있었다. 물론 한계가 있었다. 큐레이터가 선택할 수 있는 콘텐츠의 폭이 제한적이었고, 특정 주제에 대한 편향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 덕분에 오히려 독특한 취향과 창의적인 선택이 가능했다. 큐레이터를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콘텐츠를 접하게 되거나, 나의 기존 관심사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큐레이션은 한 가지 기준에 매달려 있다. 바로 대중성이며, 그 안에서도 특히 분노, 시기, 질투 같은 강렬한 감정을 자극하는 콘텐츠들이 부각된다. 이는 취향의 평균화를 가속화하고, 모두가 비슷한 콘텐츠를 소비하게 만드는 폐해를 낳고 있다.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는 목소리는 점차 커지고 있다. 많은 이들이 자극적 콘텐츠의 범람과 그로 인한 정신적 피로를 공감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단순히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깊이 생각하거나 느끼게 하는 콘텐츠를 큐레이션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좋아요나 클릭 수에만 의존하지 않고, 체류 시간이나 읽기 위해 멈추는 스크롤 지표를 활용할 수 있다. 더불어 진지한 글이나 평온한 감정을 유도하는 콘텐츠는 본질적으로 좋아요를 많이 받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자극적인 콘텐츠는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지만, 깊이 있는 콘텐츠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들여 읽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새로운 큐레이션 방식을 구현하려면 기술적인 발전뿐 아니라 콘텐츠 소비 습관의 변화도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다양한 콘텐츠를 접할 기회를 주고, 깊이 있는 콘텐츠의 가치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 이는 기술이 독자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결국 큐레이션의 기준이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자극적 콘텐츠에 매몰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오늘날의 큐레이션은 독창성과 창의성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알고리즘은 인간의 판단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준이 단순히 대중성과 자극성에 머무른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콘텐츠만 소비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과 창의적인 선택이 존중받는 큐레이션을 위해 이제는 더 나은 기준을 고민해야 할 때다. 이는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상을 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권력, 진실, 그리고 인간의 한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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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하라리는 특히 진실이 훼손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그려낸다. 포퓰리즘의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이 권력 투쟁으로 환원된다. 진실은 각자의 입맛에 맞게 변조된 무기가 되고, “누구의 진실인가?“라는 질문이 날카롭게 떠오른다. 언어마저 훼손된 사회에서 공통의 객관적 현실은 사라지고, 진실을 주장하는 것은 곧 권력을 위한 계략으로 치부된다. 하라리는 이런 상황에서 언론 같은 견제 장치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견제 기관의 건전성을 지키는 노력 없이는 민주주의와 진실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진실과 재현의 관계다. 하라리는 진실이란 현실을 1:1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면을 강조하고 다른 면을 무시하는 선택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진실이 발전의 기본 요소라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거짓으로 선동된 사실은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힘이 없다. 우리가 진실을 추구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퇴보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속성을 논하는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탈린과 그의 아들에 대한 일화였다. 스탈린은 자신을 소련 권력의 구현체로 보고,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이는 권력이 개인을 넘어서는 상징으로 기능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모습은 현대에도 이어진다. 인플루언서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넘어 브랜드화되거나, 기업들이 개별 상품이 아니라 집단적 아이덴티티를 앞세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권력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시스템이지만, 때로는 그 시스템에 압도당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관료주의에 대한 하라리의 통찰은 흥미로웠다. 관료주의는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하라리는 그것이 대규모 사회를 유지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지적한다. 관료제는 혼란을 통제하고 질서를 제공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 하라리는 이 틀 안에서 최소한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민주적 방식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그것이 유지 가능한 적절한 규모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매우 설득력 있었다.
하라리는 질서와 진실 추구의 상충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은 질서를 흔드는 의구심과 논쟁을 동반한다. 따라서 강력한 자정 장치는 사회 신화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최소한의 법과 규율로 균형을 잡는 일이야말로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포퓰리즘의 권력 독점 욕구에 대해 다루는 대목은 특히 현실적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국민을 대변한다고 믿으며, 자신들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반국가적으로 규정한다. 이는 독재로 가는 뻔한 길이지만, 이런 단순한 사고방식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라리는 이런 사고가 가져올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집단적 의식이 이를 견뎌낼 가능성을 제시한다.
넥서스


결정론 속의 자유: 사고가 만드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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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철학적으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주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분명 자유롭게 선택을 내리는 존재라고 느낀다. 점심 메뉴를 고르고, 읽을 책을 선택하는 순간, 모든 결정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실감이 든다. 하지만 이 선택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무엇이 선택을 만들어 내는지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기저에는 흥미로운 질문이 숨겨져 있다. 과연 인간의 선택은 완전히 자유로운가?

인간의 선택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무의식은 마치 함수처럼 입력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출력이 나오는 원리를 따른다. 특정 상황에서의 반응은 이미 학습된 과거 경험과 환경적 요인에 의해 대부분 결정된다. 하지만 이 함수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함수 자체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인간의 사고와 배움에서 비롯된다. 이는 자유의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자유의지는 선택의 순간에 무엇을 고를지 결정하는 능력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함수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능력에서 발견된다.

함수는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에 의해 생성된다. 유전자, 성장 배경, 사회적 환경 등 초기 요소들이 함수의 기반을 이루며, 그 이후 인간은 학습과 경험, 사고를 통해 이 함수를 점진적으로 수정해 나간다. 중요한 점은 이 변화가 느리다는 것이다. 함수는 한 번에 급격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고와 배움이 반복되면서 천천히 재구성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배우는지가 중요하다. 이는 단순히 무의식적인 반응을 넘어 더 탄탄하고 나은 함수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핵심이 된다.

깊은 사고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간은 비판적 사고를 통해 기존의 전제를 검토하고, 반성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되짚으며, 통합적 사고를 통해 다양한 관점을 결합한다. 이러한 사고 과정이 뇌의 시냅스를 재구성하며, 결과적으로 함수 자체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즉, 사고는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도구다.

결국 자유의지는 입력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측정될 수 없다. 자유의지는 우리가 사고하고 배우는 모든 순간에 작용하며, 함수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 변화는 더 나은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을 단순한 입력-출력의 기계에서 벗어나게 한다. 변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오히려 희망적이다. 사고와 배움이 쌓이는 한, 우리는 결코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자유의지는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변화와 성장의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본질적인 힘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를 새롭게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해 준다. 이 과정이 쉽지 않고 느리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온라인 인민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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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힘이 커지며, 이해 당사자가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더 이상 권력자나 소수 엘리트만이 자신의 의견을 대중에 전달하는 시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해관계가 얽힌 개인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고, 이는 직접민주주의로 한 발 더 나아가는 기술적 진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순기능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여론이 법적 절차를 대체하려는 현상은 단순히 목소리의 민주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부 빅마우스가 여론의 장을 장악하면, 소수의 부적절한 의견이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왜곡될 위험이 있다. 예컨대 특정 주제에서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소수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다수의 침묵하는 목소리는 묻혀버린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페미니즘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서도 그러한 왜곡이 반복되었다. 결국 여론은 모두의 의견을 담아내지 못한 채 특정 방향으로 기울어져 본래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다.

최근에는 이른바 ‘떼법’ 현상이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정 집단이 감정적으로 강력히 주장하는 사안이 실제 법적 논리보다 우선시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이는 집단의 요구가 여론을 통해 정치적 압력으로 작용하며, 결과적으로 법의 형성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만들어진 법안은 처음부터 합리적 논의에 기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이후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법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반으로 해야 하지만, 떼법이 이를 넘어서는 순간 사회는 불안정해질 위험에 직면한다.

법과 여론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법은 최소한의 방어막으로서 억울한 피해를 방지하고, 사적 제재를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 여론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이 법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간주하는 것은 위험하다. 법은 냉철한 객관성과 규범을 기반으로 하지만, 여론은 감정적이고 때로는 변덕스럽다. 두 영역을 동일선상에 두는 순간, 사회는 법적 안정성을 잃고 혼란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현재의 인터넷 인민재판은 과거 마녀사냥의 현대적 변형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억울한 피해자가 속출한 끝에 제도적 법이 생겨났지만, 오늘날 여론의 힘과 사적 제재는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는 듯하다. 정반합의 관점에서 이 현상은 여론이 법을 보완하되, 법적 영역을 위협하지 않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군중의 목소리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하면서 법의 영역은 여전히 확고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 법이 감정의 흐름에 흔들리는 순간, 사회는 일관성을 잃고, 억울한 피해자가 다시 속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론과 군중의 힘은 법이 미처 다루지 못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론이 법을 대체하거나, 법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

떼법의 가장 큰 문제는 법의 본질을 훼손한다는 데 있다. 법은 시간과 경험을 통해 다듬어진 공정한 절차를 따르고, 그 기반에는 사회적 합의와 객관적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떼법은 강한 감정적 공감이나 일시적 여론을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법의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기능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면 법은 사회적 신뢰를 잃고, 단기적인 해결책만을 쫓는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여론과 법은 상호보완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여론은 법이 간과한 점을 지적하고 감정적 공감을 끌어내지만, 법은 그 모든 감정을 제도화하여 객관적이고 공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법의 기본적인 기능이 흔들리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여론과 군중의 힘은 필요한 변화를 요구하되, 그 변화가 법적 절차와 객관성을 통해 검증받아야만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


카를로 로벨리에게 답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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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로벨리에게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에 대해 그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답장이 왔고,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보았지만, 자동 응답이었다. 그는 하루에도 수백 통의 메일을 받기 때문에 개인적인 답변은 할 수 없으며, 세미나 요청 같은 것도 모두 거절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스팸 메일 속에서 살며 이를 차단하려 애쓴다. 하지만 로벨리 같은 학자들에게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팸과 다른, 진지한 제안이나 아이디어 공유 메일조차 스팸처럼 여겨질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렇게 중요한 아이디어가 묻혀버릴 수도 있는 상황은 “스팸 아닌 스팸”이라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어떤 기준으로 중요한 메일을 구별할까? 혹시 그가 공개한 Gmail 주소는 단순히 스팸 메일을 처리하기 위한 창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차라리 이메일 주소를 공개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사람들의 기대를 조정하는 데 더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이메일 주소를 찾아낸 사람이 보낸 메일이라면 조금 더 신중히 검토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메일을 받는 상황에서 모든 메일에 일일이 응답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진정한 학자는 건전한 아이디어 공유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열어두려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이 일을 계기로 학자와 대중 사이의 소통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메일과 단순한 스팸 메일을 구별할 수 있는 더 나은 시스템이나, 대화의 문턱을 낮추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공개된 이메일이 소통의 창구가 아니라 벽처럼 느껴질 위험이 있다.

로벨리와 같은 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의 소통이 더욱 풍부해질 방법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 건전한 아이디어가 더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의미 있는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통제가능성과 성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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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가능성과 결과는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한다. 그것이 안전하고 확실한 선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통제와 결과 사이의 간극에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조직에서도 이 현상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관리자는 통제할 수 있는 요소에 집착하며, 그것이 조직의 성과를 보장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성과의 핵심은 때로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결정되곤 한다. 시장의 변화, 예측하지 못한 사건들, 외부 환경의 충격은 통제의 범위를 넘어서며,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와 무관하게 결과를 좌우하기도 한다.

개인적인 선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시장의 요구나 기업의 상황과 같은 외부 요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통제 가능한 부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만, 결과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결국, 통제 가능성을 넘어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성과를 만드는 데 있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더 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면서,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 결과를 좌우할 가능성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다. 이를 통해 우리는 통제 가능성과 결과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삶에서나 조직에서나, 완벽한 통제란 없다. 중요한 것은 통제의 환상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오는 실패와 좌절을 배우고 성장의 기회로 삼는 것. 우리가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운다 해도, 진정한 성과는 종종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서 결정된다. 이런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더 유연하고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비웃음을 소화시키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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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새로운 시도를 비웃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신입사원 시절 겪었던 한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리더십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몇몇 대리들이 “네가 리더도 아닌데 왜 리더십 책을 읽느냐?”며 비웃음을 보냈다. 하지만 그들의 비웃음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리더십은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미리 준비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리더가 될 기회가 왔을 때 준비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리더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웃음은 두 가지 이유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들이 리더십 공부를 정말 불필요하다고 여겼던 경우다. 그렇다면 그들은 리더십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 게으름을 합리화하기 위해, 공부하는 나를 불필요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치부한 경우다. 어느 쪽이든 이는 결국 안타까운 일이다. 한쪽은 무지로 인해 자신의 성장을 막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남을 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하지 않는 일을 비웃는다. 이는 내가 읽은 그랜트 카돈의 책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남들의 비웃음에 신경을 쓸수록 우리는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에서 멀어진다. 반대로, 자신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믿음과 본질에 대한 집중은 비웃음마저도 불필요한 소음으로 만든다. 나는 당시 비웃음 대신 리더십 공부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남들의 비웃음이 아니라 나의 성장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결국, 비웃음은 변화를 거부하거나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작은 몸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비웃음을 넘어설 때, 우리는 더 큰 성장과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비웃음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성장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그런 노이즈를 뛰어넘을 힘을 가지고 있다.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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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4시간 감시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AI 스피커, 컴퓨터 같은 기술은 우리의 말을 듣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유튜브 영상을 추천하거나 상품 광고를 보여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의 위협처럼 느껴졌겠지만, 지금은 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편리함이 보안에 대한 불안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스마트 기기들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편리함을 제공하며, 사람들은 이런 효용을 당연한 대가로 여긴다. 하지만 데이터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서는 쉽게 체감하지 못하거나, 체감하더라도 외면한다. 결국 우리는 이런 구조에 익숙해지며, 데이터 제공을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기업들이 데이터 활용에 대해 “파편화”와 “익명화”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상황을 정당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편화”는 데이터를 개별적으로 저장해 특정 개인을 바로 식별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고, “익명화”는 데이터와 개인의 연결성을 차단해 프라이버시를 보장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술은 표면적으로 안전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파편화된 데이터조차 특정 알고리즘과 기술을 통해 쉽게 재조합될 수 있으며, 익명화된 데이터도 다른 데이터와 결합하면 개인 식별이 가능해진다. 이는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치명적인 허점이다.

또한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고는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구조는 사용자에게 사실상 선택권을 박탈한다. 데이터를 거부하면 서비스 이용이 어렵고, 데이터를 제공하면 어떻게 활용될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게 된다. 익명화와 파편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의 행동과 맥락이 기록되고, 특정 개인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음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위험을 마주할 능력이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편리함과 보안 사이의 균형이다. 우리는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데이터를 제공하는 행위의 의미를 점점 가볍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익명화와 파편화가 반드시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데이터를 통해 기술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권리와 자유를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데이터를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통제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편리함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있다면, 그 대가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해봐야 한다.


무엇이 프로젝트를 복잡하게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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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기술적인 복잡도보다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난이도를 높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커뮤니케이션의 수와 범위가 확장될 때 그 영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세 명이 논의할 때와 네 명, 다섯 명이 논의할 때의 커뮤니케이션 채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는 단순히 사람 수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이 내부 팀 내에서만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다른 팀 또는 외부 파트너와 함께 진행되는가에 따라도 난이도가 크게 달라진다. 팀의 경계를 넘어서는 크로스 팀 커뮤니케이션이나 외부와의 협력은 더욱 복잡해지고, 조정의 어려움이 가중된다.

커뮤니케이션의 난이도를 높이는 또 다른 요소는 ‘컨텍스트’의 차이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에서 비즈니스와 개발이라는 두 관점이 만날 때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결과물의 속도와 시장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개발 측면에서는 기술적 완성도와 시스템의 안정성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목표 자체가 다르고, 지식의 베이스가 다르기에 대화에서 이해관계의 차이와 소통 방식의 차이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목표와 이해 수준을 조율하지 않으면 커뮤니케이션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거나, 논의 자체가 더디게 진행되거나, 심지어는 논의 자체가 정체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조정자가 필요하다. 비즈니스에 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기술적인 전문성까지 갖추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난 조정자가 회의에 참여하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답답한 상황만 반복된다. 그러나 단순히 조정의 역할을 넘어서는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바로 DRI 역할을 맡아 리더로서 전체 상황을 통합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이다. 이들은 단순한 진행의 조율을 넘어서서 프로젝트의 최종 책임자로서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고, 팀이 멈추지 않도록 끌어가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조정자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프로젝트가 예측 가능한 지연 수준을 넘어선다. 일정 조정이나 일시적인 수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해결될지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한 지연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모든 팀원이 방향성을 잃고 답보 상태에 빠지며, 프로젝트의 동력과 팀의 사기는 바닥을 친다. DRI 역할을 하는 리더가 없다면, 팀은 손을 놓은 채로 길을 잃고, 누구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다.

결국 프로젝트의 성공은 리더의 유무와 역량에 크게 달려 있다. 프로젝트가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할 때, 프로젝트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팀을 이끌어갈 수 있는 DRI의 존재가 프로젝트의 운명을 가른다.